포르투갈의 국민시인 카몽이스. 그의 시를 볼수 있는 유명한 곳, 카보 다 호카 (호카 곶)으로 간다. 우리나라로 치면 전라도 해남 땅끝마을 쯤 된다고 보면 된다. 호카 곶 십자가 기념탑에 새겨진 그의 시를 감상하자.
이곳...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
그리고 거기에서, 당신은 유럽의 왕관과 같은
루시타니아 왕가를 볼 수 있소.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
이곳이 축복받은 내 고향이오. 내사랑
오늘은 교외로 소풍가는 날. 우리의 최애 수퍼, 핑구도스에서 장을 보고, 미리 구입한 비바비아잼 카드로 카스카이스 행 국철을 타고 테주강 뷰를 즐기며 땅끝마을로 향한다.
카스카이스 역에서 내려, 카 보다 호카행 1624번 버스에 탑승 (2인기준 편도 5.2 유로, 약 45분 소요)한다. 버스는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다 어느덧 멀리 바다가 보이는 야트막한 곶에 도착한다. 워낙 유명한 곳이라 관광객도 꽤 많다. 멋진 스포츠카나 할리데이비슨을 끌고 온 자차 족들도 보인다. 하늘은 흰구름과 먹구름이 뒤엉켜 마치 19세기 인상주의 화가가 그린 하늘 그림처럼 역동적이다. 비가 올 지도 모르겠다.
사실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땅끝이란게 의미가 없다. 하지만 15세기 초 유럽 사람들에게 유럽은 세상의 전부였고 여기가 서쪽 끝이니 땅끝이라 불렀을 것이다. 여기에 진리가 있다. 우리의 인식 능력에 따라 사물이나 장소는 의미를 갖기도하고 의미가 사라지기도 한다. 우리가 죽음을 늘 인식한다면 먹고사니즘은 하찮은 것이 된다. 챨리 채플린이 한 말, "인생이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도 같은 맥락이다. 반대로 돈이 안되는 장미꽃 한 송이가 아내나 애인한테 감동과 진심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1+1=2 같은 산수나 E=mc2과 같은 과학과는 다른 영역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시간에 따라 확대되기도 퇴색되기도 한다. 15세기에 모험과 희망의 세계로 인식되었던 거친 대서양 바다는 막 땅끝에서 출발하려는 콜롬부스에게는 기대와 공포와 도전의 대상이었겠지만, 지금 21세기에 극동아시아에서 온 한 관광객에게 보여지는 푸른 대서양은 한낱 인증샷의 대상일 뿐이다. 그만큼 세월이 지났고, 인류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모험과 도전의 대상 중 어떤 것이 향후 500년 쯤 지난 후, 인류에게 시시한 대상이 될까? 우주여행? 세계일주? 직장에서 버티기? 우리는 모른다. 하지만 엄청난 변화가 있을 것은 짐작된다.
대서양을 향한 내 발걸음을 막는 천길 낭떠러지 앞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특별히 그외 볼 것 없는 그곳을 떠난다. 곶을 나오다가 아코디언으로 구슬픈 민속음악을 연주하는 한 악사를 본다. 전쟁에 휘말린 조국을 떠나 먼 이국 땅에서 "Music for Ukraine" (우크라이나를 위한 음악)이라는 자그만 글 뒤에 서서 연주한다. 인류에게 전쟁은 필요악인가? 그로 인해 고통받는 수백만명의 선량한 시민들의 운명은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세상의 끝이 겨우 이런 것인가라는 허무함과 우크라이나 악사에 대한 감정이입까지 겹쳐 갑작스레 슬픔이 밀려 왔다.
1시 22분 버스를 기다리기 지루해 옆에 돌바닥에 앉은 한 백인 아줌마와 수다를 떤다. 오스트리아에서 오신 분인데 영어가 유창하다. 내일 포르투로 이동할 거라고 했더니 포르투의 해산물 맛집을 추천해 준다. (Matosinhos라는 포르투 외곽의 동네인데 포르투 여행 말미에 갔었고 매우 만족했다.) 감사의 표시로 하회탈 열쇠 고리를 선물하니 무척 좋아한다. 남편이랑 같이 여행을 많이 다니시는 약간 똘똘이과 아줌마이다. 1624번 버스 노선표를 미리 출력해서 갖구 다니시는 것만 봐도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시다. 아줌마는 영어 뿐 아니라 독일어, 스페인어, 이태리어까지 가능하단다. 그리고 유럽 중부 뿐 아니라,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북유럽, 그리스, 남미, 아프리카까지 다 여행을 하셨단다. 극동지역에서 온 나로서는 주변국으로 여행 근접성이 좋은 나라에 태어난 아줌마가 무척 부러웠다. 한때는 전세계를 식민지화 해서 중국까지 나눠먹으려 했던 잘 나가던 유럽이다. 안타깝게도 그 후손 유럽인들은 언어나 음식 등 여러 제약 때문에 동쪽으로는 인도, 발리, 싱가포르까지만 와 봤다는 사람들도 많다. 한국, 중국, 일본까지 와 본 유럽인이 흔하진 않아 보인다. (그래서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라는 예능 프로가 한때 인기가 있었나 보다.)
갑자기 빗방울이 뚝뚝떨어지는 데 우리의 똘똘이 아줌마, 과연 바로 우산을 꺼내신다. 준비성 100점이다. (우리 부부는 지붕 있는 곳으로 피신한다.)
1624번 버스 타고 다시 카스카이스로 이동했다. 점심은 피자가 땡겨서 역근처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들어 갔는데 대박이다. 이름은 "La Tagliatella" 인데 인테리어도 근사하지만 무엇보다 주문한 풍기 피자와 베라 나폴리 스파게티 맛이 환상적이다. 강추하고픈 식당이다.
점심 먹는데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잠시 비가 그쳤을 때 카스카이스 마을과 해변 구경을 하려고 했으나 또다시 폭우가 시작된다. 골목길의 아기자기한 기념품샵을 좀 구경하다가 "오늘은 날이 아니개벼" 하며 돌아가기로 했다. 바깥기온은 16도, 추위에 닭살이 돋는다. 하지만 비를 맞으면서도 만면에 웃음을 띠며 걸어가는 해변 패션의 휴양객들의 자유로운 마음이 부러웠다.
근데 이 사람이 누구일까?
얼핏 한국의 장년과 노년 세대가 기억하는 유명 코미디언이 생각 났지만, 유명한 포르투갈 출신 소설가 주제 사라마구란다.
국철로 리스본 Cais do Sodre로 이동하는데 옆자리 미국 아줌마 네명은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에너자이저다.
중간에 벨렝에서 내려 "파스테이스 드 벨렝"에서 에그 타르트를 사먹는다. 이정도면 에그타르트 중독이다. 파스테이스 드 벨렝에서 아내가 벨렝탑에서 만났던 키작은 한국 아줌마와 20분을 서서 수다를 떨었는데, 나와 그녀의 남편은 뻘쭘하게 기다린다. 그 부부는 리스본에서 크루즈타고 독일로 갔다가 다시 이태리로 넘어 가서 라벤다 축제 즐긴 다음, 돌로미티 트레킹을 하고 난뒤 7월 경에나 한국으로 귀국 예정이라고 한다. 작년에도 남편과 97일간 남미 여행을 했다고 하니 우리보다도 연세도 분명히 많아 보였는데 체력들이 대단하다. 벌써 노안이오고 무릅이 시큰한데 과연 나는 10년 후에도 해외 여행이 가능할까? "아니다. 여행은 조건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다!!! " 라고 외치며 정신 승리를 거머쥔다.
다음 방문한 Lx Factory 는 과거 공장건물들을 개조해서 식당, 상점, 바, 서점 등이 입주해 있는, 젊은이들과 여행객들의 힙 플레이스이다. 카스카이스를 못 본 데 대한 보복으로 여기서 신나게 사진촬영을 해댄다.
기발하고 창의성 넘치는 각종 인테리어, 외부 조각/그림들, 기념품... 마치 일본의 도큐핸드 샵 구경하는 것처럼 재미있었고, 나의 뇌는 행복했다.
Lx Factory 둘러보고 숙소로 귀가하니 저녁 7시 반. 컵라면, 에그타르트, 착즙 오렌지 주스를 먹고 10분 쉬었다가 생수도 사고 산책도 할겸 다시 거리로 나왔다. 땅거미는 지고 있는데 놀랍게도 붉은색 유니폼을 입은 젊은이들이 곳곳에서 갑자기 등장하기 시작한다. (붉은 악마들인가?) 맥도날드에도, 길거리 바에도 TV가 있어 수십명의 젊은이들이 붉은 유니폼 입고 포르투갈 대표 맥주 "수퍼복" 마시면서 축구 중계를 시청하고 있다. 궁금해서 한 청년에게 물어보니, 리스본이 연고지인 Benfica팀과 Sporting 팀간 리그 마지막 경기인데, 그 청년들은 Benfica를 응원한다고 한다. 리스본 북쪽 지역은 Sporting 팀, 남쪽은 Benfica를 응원 한다는데 다들 목소리가 극도록 흥분해 있다. 포르투갈의 3F가 Fatima (파티마, 카톨릭 교), Fado (파두), Football 인데 과연 축구 열기가 대단함을 느꼈다. 오늘 만일 Benfica가 승리하고 리그 우승 확정시 폼발광장에서 대규모 축하 파티가 있을거란다. 핑구도스에서 물, 핸드크림을 사서, 720 버스 타고 혹시나 볼거리가 있을까 싶어 즉흥적으로 폼발광장으로 이동한다. (운전 기사 아저씨도 축구를 틀어 놓고 운전하는데, 겁나 난폭운전이다.ㅠㅠ 마음은 축구장에 있는 듯.), 에두아르도 7세 공원 도착해서 석양을 배경으로 한 폼발 동상 사진을 찍고, 공원을 올라가려니 인적이 너무 드물어 무섭다. (낮에는 북페스티벌이 열렸던 곳 같은데 파장분위기에 직원들은 전부 삼삼오오 축구 관람이다.) 날도 춥고 숙소를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구글맵상으로 검색한 숙소행 버스 783번 버스를 30분이나 기둘렸는데 안 온다. ㅠㅠ. 대신 738번 타고 겨우 숙소 복귀했다. 늘 계획파이자 준비파인 아내에게 또다시 컴플레인을 듣고, 여행 총괄 매니저로서 깊은 반성의 자세를 갖는다.
밤은 깊어가는데, Benfica가 2:0으로 지고 있다가 후반 두 골 만회해서 동점이 되었고 밖에선 응원 함성이 천둥소리보다 크다. 축포 소리까지 들리고 오늘 일찍 자기는 글렀다.ㅠㅠ
내일은 리스본을 떠나 북쪽의 도시 포르투로 이동할 예정이다.
To be continued~~
'4. 여행하며 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르투갈 여행 - 렐루서점 등 (5/23일) (1) | 2023.07.09 |
---|---|
포르투갈 여행 - 리스본에서 포르투로 (5/22일) (2) | 2023.07.08 |
포르투갈 여행 - 28번 트램, 아줄레주 박물관, 파두공연 (5/20일) (0) | 2023.07.06 |
포르투갈 여행 - 리스본 벨렝 지구 (5/19일) (0) | 2023.07.05 |
포르투갈 여행 - 신트라 투어 (5/18일) (2) | 2023.07.04 |